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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어터플러스

모든 떠남에는 사무침이 있다_연극 <남쪽 나라로>

모든 떠남에는 사무침이 있다

 

지난 9 2일부터 10 6일까지 대학로 선돌극장 무대에 오른 연극 <남쪽나라로>.
writer 김일송


 

어떤 잘 짜인 이야기는 마치 도미노 같다넘어진 조각이 다른 조각을 넘어뜨리고그런 과정이 연쇄적으로 이어지듯앞 사건이 뒤따르는 사건의 계기가 되고그렇게 촉발된 사건들이 연이어 일어난다그런가 하면 또 다른 잘 짜인 이야기는 퍼즐 같기도 하다어떤 그림인지 알 수 없는 파편 조각들이 모여 큰 그림을 완성하듯아무 개연성이 없는 듯한 파편적 서사들이 모여 하나의 큰 서사를 이루기도 한다연극 <남쪽나라로>는 후자에 가깝다.

<남쪽나라로>는 <서울시민>, <과학하는 마음시리즈로 알려진 일본작가 히라타 오리자의 작품이다전통적 작법에 따르면 서사는 도미노처럼 기승전결의 구조를 갖춰 하나의 선()처럼 진행되어야 한다그러나 히라타의 작품은 면()처럼 인식된다왼쪽 귀퉁이의 조각(에피소드)을 보여주었다가바로 오른쪽 귀퉁이 조각(에피소드)을 보여주는 식이다.



연극 <남쪽나라로>에서 퍼즐 면은 배의 갑판이다. <남쪽나라로>는 히라타 오리자가 1990년대에 발표한 작품으로이번 공연은 성기웅 연출가가 2023-4년 근미래 한국인의 이야기로 재창작에 가깝게 각색했다.(특히 맨 앞 장면이 제일 뒷 장면으로 이어지는 편집된 시간은 히라타 오리자의 전작에서는 발견하기 어려운 형식으로성기웅이 적극적으로 각색한 부분으로 짐작된다.)

본론으로 돌아가 히라타 오리자 작품의 공간적 배경은 대개 이런 식이다거실로비여행자 숙소처럼 여러 사람들이 모였다 흩어지는 장소뚜렷한 목적 없이 그저 지나치거나잠시 머물다가는 곳이다공간의 성격처럼 여기서 벌어지는 대화에도 두드러진 목적성은 보이지 않는다설명이나 설득토론논쟁처럼 담론적 성격의 대화는 거의 없다말하자면 신변잡기에 관한 잡담에 가깝다.

<남쪽나라로>의 등장인물들은 대개 고향을 등지고 태평양의 팔라우로 이민을 떠나는 사람들이다그러나 연극은 그들이 고향을 떠나게 된 계기나 먼 타국으로 이민을 가는 목적 등을 보여주지 않는다이따금 속내가 드러날 듯 임계점에 접근하는 대화도 있지만임계점에 직전에 화재를 전환하는 식이다관객이 할 수 있는 거라곤 짐작밖에 없다그런데 그 짐작조차 쉽지 않다무대 이곳 저곳에서 동시에 대화가 벌어지기 때문이다이른바 ‘동시다발 대화’라 불리는 이러한 방식은 히라타 오리자의 전매특허와 같은 극작법으로종래의 전통적 글쓰기에서는 금기시해온 방식이다동시다발 대화는 한편으로 사실적인 연극을 지향하는 방식인 동시에다른 한편으로 희곡상의 모든 말에 의미를 부여하는 사실주의의 규범을 깨뜨리는 방식이다.

 



이처럼 연극 <남쪽나라로>에는 어떤 목적을 찾을 수 없는개연성 없는 대화들이동시에 여러 곳에서 진행된다아무 계산 없이 자른 현실의 단면이 편집조차 거치지 않고 그대로 보인다그렇다면 무엇이 중요할까성기웅은 이렇게 쓴 바 있다‘히라타 오리자의 희곡에서는 무대 공간에 누구누구가 함께 있는가누구는 없는가 하는 문제야 말로 그 장면의 이야기 자체를 결정할 정로도 중요하다.’ ‘무대에 있던 많은 인물들이 빠져나가고 단 둘이 남는 장면은 대개 폭발적인 힘을 갖는다.

연극에서는 독신남 여세민과 그의 대학시절 후배 김지현의 대화가 그러하다그리고 여세민과 김지현의 딸 부하은의 대화가 그러하다이 공연에서 빛나는 문장 중 하나를 고르라면 김지현이 여세민에게 처음으로 전 남편의 폭력성향에 대해 고백하는 장면에서 찾고 싶다“걔(하은)가 저렇게 삐뚤어진 것도 어쩌면 다..” “어그건, …‥ 아냐.” “어?” “하은인 삐뚤어진 거 아니라고그냥 그거외로운 건데.…‥(히라타 오리자의 작품에서는 구두점의 개수말줄임표의 개수도 중요해그대로 옮긴다)

외로움은 히라타 오리자의 작품에 깔려 있는 기본정서다그리고 <남쪽나라로>부터 시작해 <잠 못 드는 밤은 없다>, <모험왕>, <신모험왕>에 이르기까지 히라타 오리자는 늘 떠남에 대해 이야기한다무릇 사람이 떠나고자 마음먹을 때에는 마음에 사무치는 바가 있기 마련이다사무침이 없으면 그 떠남은 한낱 유람에 지나지 않는다사람들에겐 누구나 자신만의 영역이 있는데그 영역이 좁아지고 좁아져 한 개의 소실점으로 화할 때사람들은 짐을 꾸린다떠난다고 하지만사실인즉떠남이란 자신 혹은 세상으로부터 쫓겨나는 것이다. <남쪽나라로>의 인물들에게서 망명의 냄새유배의 냄새가 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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