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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어터플러스

진심이 닿다_바이올리니스트 김계희

진심이 닿다

 

국제 콩쿠르에서의 한국인 수상 소식이 무감각해질 정도로 젊은 클래식 연주자들의 활약이 뜨겁다.
그 가운데 최근 차이콥스키 국제 콩쿠르에서 1위를 수상한 바이올리니스트 김계희를 만났다.

editor 이민정 photographer 김진호 place 금호아트홀 연세


                                                                                                                                                                                           

생의 마지막 콩쿠르를 의미있게 마무리했어요.
아직 나이가 조금 남아서(웃음) 내년까지는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너무 힘들어서 더 이상 하고 싶지 않아요. 사실 차이콥스키 국제 콩쿠르도 계획에 있던 대회는 아니었어요. 워낙 큰 콩쿠르라 20대 때 두 번 정도 나갈 수 있는데 이상하게 시기가 맞지 않아서 원서를 내지도 못했죠. 제 나이가 지금 서른 하나인데 큰 관심이 없었다가 어느 날 우연히 지원자 공지를 보았어요. 이번에는 정말 운이 좋게 제가 원서를 낼 수 있는 조건이 되는 거예요. 실력이 돼도 원서를 내기 어려운 상황이 꽤 있거든요.

그럼 오디션 준비는 어떻게 하셨어요?
솔직히 3월 말쯤에 내놓고 새까맣게 잊었는데(웃음) 5월 17일 DVD라운드 합격됐다고 연락이 왔어요. 대회 치르기 위해 6월 17일에 출국했으니 딱 한 달 준비한 거예요. 가장 짧게 준비한 대회인데, 콩쿠르 경험이 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 같아요. 그럼에도 걱정은 컸죠. 차이콥스키 협주곡의 경우 마지막 연주가 6년 전이라 잘해낼 수 있을까 싶었고, 1차 지정곡인 파가니니 카프리스 24번은 어릴 때 악보 읽은 정도가 전부라 부랴부랴 손에 익혀야 했어요. 파가니니 곡은 난해한 요소가 많아서 실수를 줄이기 위해서는 무대에 많이 서 봐야하거든요. 경험이 별로 없는 상태라 걱정이 많았어요.

라이브 스트리밍으로 경연 무대를 보았는데 처음에 땀을 많이 흘려서 무슨 일이 있나 싶었어요. 결국 훌륭하게 잘 풀어나갔지만.
긴장을 했던 건 아니었는데 많이 아팠어요. 쉴 틈 없이 연습해서 피로가 누적되다 보니 면역력이 떨어졌는지 계속 열이 나더라고요. 감기 기운도 있었고요. 저는 오히려 긴장하면 땀이 나지 않아요.

그럼에도 청중의 호응이 다른 연주자들에 비해서 굉장히 좋았어요.
저도 연주하면서 느꼈던 것 같아요. 뭐랄까, 공연장의 기운이 살아있는 듯한 느낌이랄까요. 끝난 뒤 청중분들이 찾아와 주셔서 같이 사진을 찍고 제 사인을 받으시기도 하고… 저도 그 이유를 잘 모르겠지만, 제가 더 크게 감동받았던 순간이었습니다.

연주하는 동안 결과에 대한 예상을 하기도 하나요?
전혀요. 신경 쓸 겨를이 없을 뿐 아니라 개인적으로 저는 결과보다 과정을 중요하게 생각해요. 예전 피겨스케이트 김연아 선수의 연습 장면을 TV에서 보여준 적이 있어요. 스트레칭을 하고 있는 선수에게 기자분께서 “무슨 생각 하세요?”하고 물어보세요. 그때 김연아 선수가 이렇게 대답하죠. “그냥 해요.” 운동에 집중을 하지 않은 채 그냥 한다는 개념이 아니라 운동 외에 다른 생각을 하지 않는다는 의미거든요. 음악도 다른 생각을 할 여유가 없어요. 지금 연주하는 작곡가의 음악을 청중에게 최대한 잘 전달하고 싶은 바람이 있을 뿐이죠.

시상식에서 이름이 불려졌을 때는 약간 당황하신 것 같았어요.
아, 맞아요. 대회를 나갈 때 목표가 있다거나 결과를 바라지 않은 편인데, 다만 3라운드가 마음에 들지 않은 건 있었어요. 이렇게 큰 대회에서 파이널에 오른 것만으로 너무 영광스러운 일이라 1등 같은 건 전혀 생각하지도 못했고, 다른 연주자들이 어떻게 연주했는지도 몰랐기 때문에 완전 마음을 비우고 있었어요. ‘여기까지 왔으니까 이제 됐어. 더 이상 바랄 것도 없어.’ 그런데  제 이름이 불려진 거예요. 너무 감사한 일이지만 당황스러우면서 ‘아, 어떡하지?’ 이런 느낌도 있었어요.

그렇다면 언제 실감하셨어요?
지금도 못하고 있어요. 근데 연락이 너무 많이 와서 만나 뵐 분들이 많아졌고, 저는 이전과 똑같은 사람인데 이 타이틀 하나 때문에 하루 아침에 바뀌는 느낌이 조금 무섭다고 해야할까요. 이 수상이 제 인생을 책임져주지 않지만 어쨌든 이렇게 영향을 끼치고 있네요. 그래서 더 성숙하고 더 성장해야겠다는 생각을 많이 해요. 음악인으로서는 물론이고 성인으로서 스스로를 책임지고 어떠한 상황에도 대처할 수 있는 능력이요.

이번 콩쿠르에는 첼로와 성악에서도 한국인 수상자가 나왔어요.
바이올린에서는 한국인이 저 혼자였기 때문에 몰랐어요. 마지막 성악 시상식에서 콩쿠르 협회 관계자이자 지휘자분께서 한국인들이 너무 대단하다는 멘트를 하셨다고 들었어요. 그때 아, 한국인이 많이 받았구나 알게 됐죠. 한국인, 정말 최고예요. 연주자 반열로 가느냐 그렇지 않느냐는 알 수 없지만 콩쿠르 결과로만 보자면 이제 월등한 세계 1등이라고 생각해요. 너무 자랑스러워요.

지금까지 굵직한 대회에서 수상을 많이 했기 때문에(제오르제 에네스쿠 국제 콩쿠르, 안드레아 포스타치니 국제 바이올린 콩쿠르, 무네츠구 엔젤 바이올린 콩쿠르, 그네신 주니어 국제 음악 콩쿠르에서 우승을 석권했고, 이외에도 토룬 국제 바이올린 콩쿠르, 영 차이콥스키 국제 콩쿠르, 윤이상 국제 음악 콩쿠르에서도 입상한 바 있다) 어떤 연유로 이 대회에 나가셨을까 궁금했어요.
정말 안타까운 현실이지만 저희가 할 수 있는 게 정말 없어요. 동료들과도 이런 얘기를 줄곧 하거든요. 진짜 할 수 있는 게 콩쿠르 밖에 없으니 어느 정도 수상이 있어도 계속 나가는 거예요. 물론 선택은 저희가 하지만, 클래식은 우리 음악이 아니기 때문에 아직까지 한국에서 콩쿠르 경력이 없으면 인정받기 어려운 시스템인 것 같아요. 어쨌든 저희는 한국인이기 때문에 여기 시장도 알고 있어야 하거든요. 콩쿠르도 DVD라운드를 통과해야 나갈 수 있기 때문에 사실 보여지는 것보다 훨씬 어렵고 복잡해요. 준비하는 분들이 얼마나 많겠어요?

전 세계에서 잘한다는 분들만 모이니까요.
러시아가 전쟁 중이어서 다소 어수선한 분위기가 있었지만 이번 대회 지원자가 7백명 대였다고 해요. 지난 대회가 9백명 대라 20% 정도 줄었다고 하는데 저는 지금 숫자도 엄청나다고 생각하거든요. 정말 전 세계 많고 많은 젊은 친구들이 도전을 하는 거고, 저도 그중 하나였던 거죠. 그렇기에 대회에서 상을 탔다고 무조건 잘하는 친구, 못 탔다고 무조건 실력이 없는 게 아니에요. 하지만 사람들의 시선이나 연주 기회는 모두에게 갈 수 없으니 실력만으로 되는 세상도 아닌 것 같아요. 실력은 기본, 여러가지 플러스되는 요소들이 있어야 무대 기회가 주어져요.

바이올린은 언제부터 시작했어요?
네 다섯 살 즈음에 처음 바이올린이라는 악기를 알게 되었고 제대로 배우기 시작한 건 여섯 살 때였어요. 여섯 살 때부터는 한 번도 쉰 적이 없어요. 정말 쭉~.

너무 좋아서 그런 거죠?
제게는 바이올린이 장난감이었으니까요. 어릴 때 그렇게 흥이 많았대요. 피아노를 싫어한 이유가 가만히 앉아서 연주하는 거라 흥이 나지 않아서였다는…(웃음). 바이올린은 돌아다니면서 켤 수 있으니까 배우는 게 까다로워도 훨씬 좋아했던 기억이 나요.

가족 중 바이올린을 권유한 분은 누구인가요?
아버지가 바이올린을 좋아하셔서 집에 CD와 LP가 엄청 많아요. 바이올린만 좋아하시는 게 아니라 그냥 클래식을 전반적으로 다 들으세요. 거실에 늘 클래식 음악이 틀어져 있었기 때문에 어릴 때부터 익숙한 편이죠. 정확하게 기억이 나지 않지만 제가 노래하는 걸 좋아하기도 했고, 절대 음감이었는데 이런 부분을 부모님께서 빠르게 발견하셨어요. 그래서 자연스럽게 시작하게 된 거예요.

중간에 그만두고 싶은 생각을 해본 적 있으세요?
머릿속으로는 수없이 많이 했죠. 싫어서가 아니고 힘들어서요. 하지만 짧게라도 그만둔 적은 없어요.

주로 스스로의 연주가 마음에 들지 않을 때 힘든가요.
제 연주가 만족스럽지 못하면 충돌이라고 해야 할까요. 제가 원하는 이상향에 다다르지 못할 때 너무 고통스럽고, 물론 아직 이렇게 말씀드릴 단계가 아니라는 것도 알지만, 제가 하는 음악이 끝 없는 배움이라는 것 정도는 알거든요. 이 끝이 없다는 게 조금 버겁게 느껴질 때가 있는 거죠. 종종 사람들이 ‘뭐 매일 저렇게까지 힘들게 사냐’ 하시기도 하는데 이게 저희의 일이니까. 아,일이라기보다 삶일까요? 일과 삶의 경계가 없으니까요. 음악하시는 많은 분들이 공감하실 텐데 좋은 점도 있고 좋지 않은 점도 있어요. 휴식이 제대로 없다 보니 일의 연장인 느낌이 드는 동시에 또 그만큼 행복을 가져다 주기도 하거든요. 끝없이 도전하고 끝없이 노력해야 하는 분야인 건 맞아요.

연주자의 삶에 대해 깊이 알아가기 시작한 건 언제였나요.
어릴 때도 막연하게 음악은 끝이 없다고 생각했지만 진지하게 느끼기 시작한 건 20대 중반 정도요? 끝없이 탐구하고 목말라 하고 계속 스스로를 푸시해서 앞으로 나아가는 일은 나이들수록 어려운 것 같아요. 저희도 사람인지라 약간의 보상 혹은 리턴이 와준다면 에너지를 얻게 될 텐데 또 그렇지도 않으니까 더 힘들었던 것 같아요.

그렇다면 콩쿠르 수상 결과가 약간의 위로가 되기도 하나요.
보상이라는 단어는 어울리지 않는 것 같고요, 포기하지 않고 계속 해온 것에 대한, 그러니까 내가 헛된 시간을 보낸 건 아니었구나에 대한 메시지 정도라고 생각해요. 마냥 기쁘다고 말할 수가 없는 이유가 앞으로 더 잘해 나가야 하기 때문에 책임감이 커요.

아버지께서 얼마나 좋아하셨을까요.
네, 하지만 제대로 얘기도 못 나눈 상태이긴 합니다.(웃음) 저희 아빠는 관여하지 않으시되, 서포트를 잘해 주셨어요. 최고죠.

학창시절, 굉장히 성실했을 것 같아요.
중학교, 고등학교 때는 잘하고 싶은 마음이 많았던 것 같은데, 잘 모르겠어요. 다만 제가 좋아하는 무언가가 생기면 끝까지 밀어 붙이는 성격은 있었던 것 같아요. 대학교 때는 잘하고 못하고를 떠나서 열심히 살았어요. 정말 바빴거든요. 저는 노는 일에 큰 흥미가 없어요. 집에 있는 걸 좋아하는 성격이 음악에 도움이 된 것 같기도 하고요. 모든 일을 열심히 하는 사람은 아니고 제가 하는 일에만 성실한 편인 것 같습니다.

서울대학교를 졸업했고, 미국(커티스음악원)과 유럽(뮌헨국립음대)에서도 음악 공부를 했어요. 다른 지역에서의 경험이 도움이 되던가요.
요즘은 정보가 넘치기 때문에 교육적인 부분으로만 따지면 한국에서도 충분히 잘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문화적인 부분이나 실생활에서 오는 경험과 느낌은 몸소 겪어봐야 더 크게 다가오는 것 같아요. 제가 외국에서 오래 살았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그들의 역사, 문화, 생활 등을 많이 배웠습니다. 돌이켜보면 예원학교와 서울예고 다닐 때도 해외 드나드는 일이 좀 많았어요. 그것도 늘 혼자 다녔죠. 대회든 연주든 부모님과 함께 하는 경험 말고 무조건 혼자가서 경험하고 싶었거든요. 독립적인 편이어서 그런가 봐요. 중학교 3학년 때만 러시아를 혼자서 세 번이나 다녀왔어요.

무섭지 않았나요?
지금 생각하면 중3이 어떻게… 아찔하죠.(웃음) 영어를 잘했던 것도 아니었고 종이 지도 보면서 찾아 다녔으니까요. 30분, 1시간 이렇게 걸어 다니면서 건물 구경하고 거리 구경하는 게 좋았어요. 많은 경험은 분명 감사한 일입니다.

연습을 하지 않을 때는 뭐하세요?
저는 학생 가르치는 일을 많이 한 편이에요. 대학을 한국에서 나오다 보니 출강하는 학교도 있었고, 어린 친구들을 많이 만났어요. 이제 제 연주에 집중해야 하기 때문에 레슨은 줄여야 할 것 같아요.

더 많은 학생들이 김계희 선생님께 배우길 원할 텐데요.
지금은 제 코가 석자라(웃음) 연습을 늘려야 해요.

지면을 빌려 감사 인사를 전하고픈 스승님이 계신가요.
너무 많은데요. 제가 항상 첫 번째로 말씀드리는 분은 서울대학교 김영욱 교수님이세요. 선생님을 만나 뵐 수 있던 것 자체가 저는 큰 행운이라 생각을 하고, 20대를 통틀어 저를 가장 많이 봐주신 분이시죠. 저의 ‘업 앤 다운’을 다 보셨고(솔직히 ‘업’은 한 순간이고 대개 ‘다운’이었지만.) 제가 힘들 때마다 여러모로 붙잡아 주셨어요. 음악에 어마어마한 존경심을 지니셨기에 그 영향을 많이 받은 것도 사실이고요. 또 어릴 때 가르쳐 주셨던 이선이 선생님, 구본주 선생님, 김숙정 선생님, 뮌헨국립음대의 크리스토프 포펜(Christoph Poppen) 선생님과 레나 노이다우어(Lena Neudauer) 선생님께도 정말 감사드립니다. 제가 복이 많아서 모두 좋은 선생님들을 만났어요.

답변 중에 ‘다운’이 훨씬 많고 ‘업’은 한 순간이라고 말씀을 하셨는데 업 되는 순간은 무대 위인가요.
음악인으로서의 힐링 포인트는 현장인데 무대 위에서는 관객들의 좋은 기운이 느껴지는 순간들이 있어요. 한 시간 프로그램을 하면 한 시간 다 마음에 들 수는 없어요. 하지만 그날의 온도와 분위기 등 청중과 제가 일치되는 특별한 순간이 딱 있어요. 그런 순간은 준비 됐을 때만 와요. 준비가 되어 있지 않으면 제가 잡을 수가 없어요.

음악인의 삶은 일반인이 보기에 버거워 보이거든요. 그럼에도 음악을 지속시키는 힘은 무엇인가요.
제가 다른 인생을 살아보지 않아서 잘 모르겠지만 조금 다른 것 같아요. 저는 다른 분들이 재밌다고 하는 것에 재미를 잘 못 느끼거든요. 이렇게 말씀드리는 것이 조금 오글거리기도 하고 자격이 되는지도 모르겠는데, 음악은 제 인생을 말해주기 때문에 제 성격, 가치관, 경험이 다 들어간다고 생각해요. 그 깊이가 말로 표현이 안돼요. 즐거움이라는 단어로 부족할 만큼. 그 깊이가 너무 깊어서 때로 힘들기도 하지만 그만큼 전율이 돋고, 감동이 있어요. 그래서 계속하게 됩니다. 제가 음악을 멈추지 않게 만드는 동력이고, 이 동력을 결과에서 찾으면 안된다는 것도 알고 있어요. 이번 콩쿠르 준비는 비록 한 달 밖에 못했지만 가장 힘든 동시에 가장 행복한 시간들이었어요. 서른 살까지만 나가겠다는 나름의 막연한 기준이 있어서 하고 싶지도 않았고, 어찌 보면 살짝 갈피를 잃고 있던 상황이었기에 콩쿠르 자체로도 약간 활기가 생기더라고요. 어쨌든 준비하기로 마음 먹었기 때문에 음악을 많이 듣기 시작했어요. 빨리 프로그램에 익숙해지고 싶어서 의도적으로 들었는데, 듣다 보니까 너무 좋은 거예요. 내가 이렇게 좋은 음악과 왜 멀어져 있었을까, 너무 행복해서 실내악, 오케스트라, 성악 다 들었어요. 다른 대회 때보다 시간이 없었지만 훨씬 즐겁게 준비했어요.

지금 저희가 있는 곳이 금호아트홀인데, 금호문화재단과는 인연이 깊죠?
아, 정말 오랜만에 와봅니다. 제가 2004년 6월 19일에 이곳에서 금호영재콘서트로 데뷔했어요. 독주를 할 일이 별로 없는 십대 시절, 이렇게 좋은 재단 덕분에 무대에 설 수 있었거든요. 무대 경험은 실력이 느는 계기가 되니까요. 오랜 기간을 어떤 재단과 계속 연결되며 지내는 곳은 금호가 유일해요. 정말 감사한 마음입니다.

앞으로 어떤 연주자가 되고 싶은가요.
제일 어려운 질문이에요. 음악에 대한 태도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시는 김영욱 교수님께서 세상에는 ‘Successful musician’과 ‘True musician’이 있다고 말씀하세요. 두 개를 다 가지면 좋을 수도 있겠지만 저는 ‘트루 뮤지션’이 되고 싶고 또 그렇게 되기 위해 노력하고 싶어요. 음악에 대한 사랑을 잃지 않는 것, 진심을 담아서 표현하는 것, 끊임없이 배우고자 하는 의지… 이 세 가지를 잃지 않았으면 좋겠고요. 쉽지 않겠지만 음악이 주는 행복과 감동을 돈으로 살 수 없기에 항상 잊지 않으려 노력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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