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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어터플러스

사랑이 완성한 시간_뮤지컬 <베르테르> 음악감독 구소영

사랑이 완성한 시간

뮤지컬 <레 미제라블> 10주년 콘서트를 보며 꿈을 키운 음악감독 구소영.
어렸을 적 그에겐 10년이라는 시간이 막연한 꿈이었다.
뮤지컬 <베르테르> 20주년 공연을 눈앞에 둔 지금,
그는 세월이 눈 깜짝할 새 지나가 버렸다며 웃어 보였다.
editor 나혜인 사진제공 CJ ENM


뮤지컬 <베르테르>가 20주년을 맞았다. 한국 창작 뮤지컬의 효시인 <살짜기 옵서예>가 1966년에 초연됐으니 약 60년의 뮤지컬 역사 중 1/3을 살아온 것이나 마찬가지다. 작품이 걸어온 길이 평탄 하기만 했던 것은 아니었다. 초연 이후 더이상 공연을 올릴 수 없는 상황에 부딪히기도 했다. 그러나 수많은 작품이 생사를 달리 하는 한국 창작 뮤지컬 시장에서 <베르테르>는 살아남았다. <베르테르> 탄생의 순간에 함께 한 구소영 음악감독도 상상 못 했던 일이다.

초연을 함께한 창작진으로서 <베르테르> 20주년에 대한 감회가 남다르실 것 같아요.
사실 실감이 잘 안 나요. 20대 때 뮤지컬 <레 미제라블> 10주년 콘서트 영상을 봤었거든요. 그때 막연하게 ‘언젠가 내 작품이 10주년쯤 됐을 때 저렇게 폼나고 의미 있는 콘서트를 하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그걸 막연한 꿈으로 생각하고 살았는데 갑자기 제가 <베르테르>로 20주년을!(웃음) 사실 저는 다른 작품으로 할 줄 알았거든요. <베르테르>는 제가 너무 철없던 시절에 만든 것이다 보니 얘가 20년이나 올 거라는 생각을 못 했나 봐요. 그래서 꿈이 이뤄지긴 이뤄졌는데 당황스럽고 현실감이 좀 없어요.

<베르테르> 자체 팬덤이 두터워서 예상하셨을 법도 한데요.
일반적으로 말하는 뮤지컬다운 작품은 아녔기 때문에 그런 생각이 들었던 것 같아요. 초연 당시 뮤지컬 선수들만 모여서 만든 작품도 아니었고요. 대표님을 제외하고는 다들 처음 뮤지컬에 도전해서 가슴만 뜨거운, 정말 베르테르 같은 인간들이 모였던 거거든요. 그렇게 만든 작품이 결국 제가 꿈꿨던 10주년, 20주년을 맞게 해줄 줄은 몰랐던 거죠.

그렇기 때문에 더 감동적이실 것 같아요.
네. 맞아요. 마냥 아기인 줄 알고 키우던 자식이 갑자기 커서 효도하겠다고 상 차려준 기분인데, ‘언제 세월이 이렇게 흐른 거지?’ 이런 기분 있잖아요. 그래서 보통 20주년이면 멋있는 말을 하고 싶은데 이게 진짜 제 기분이에요. 도대체 언제 이렇게까지 시간이 흐른 거지? 20주년을 맞이한 작품이 <베르테르> 너라고? 제일 속썩이더니!(웃음)

2015년 이후 5년 만에 돌아온 작품이기도 해요. 달라진 점이 있을 까요?
조금 더 촘촘해진 것 같아요. 이 작품을 오래 했던 사람들과 처음 하는 사람들의 에너지들이 융합되면서, 때로는 새로운 질문 앞에 서기도 했고 때로는 익숙함에서 오는 깊이랑 만나기도 했고요. 그런 과정에서 깊이와 밀도가 생긴 게 이번 20주년 <베르테르>가 아닌가 싶어요. 얼마 전 뮤지컬 <풍월주>라는 작품을 하면서 한 배우가 이런 이야기를 했어요. “다섯 번까지 했을 땐 이 작품에 힘이 있는 거다.” 그런데 <베르테르>는 20년을 왔잖아요. 여기에 나이테처럼 세월의 흔적과 우리의 고민, 방황, 열정 등이 다 쌓여있는 거예요. 그러니 단단해지는 거죠.

관객들이 새롭게 느낄 만한 지점도 있을까요?
<베르테르>를 오래한 장인들과 뉴 캐스트들이 반반씩 섞인 건 이번이 처음이에요. 기존에 하던 분들에 한두 명 정도 새로운 분들이 들어오거나, 2013년처럼 오랜만에 복귀하면서 아예 뉴멤버들로 짰던 적은 있었죠. 지금 보면 알베르트 역의 이상현 배우는 4연을 함께 하고 있고, 박은석 배우는 처음이에요. 롯데 역의 이지혜 배우도 세 시즌을 함께 하고 있는데 김예원 배우는 처음이고요. 엄기준 배우는 무려 18년을 함께 하고 있고 규현 배우는 두 시즌, 나머지 베르테르는 다 새로운 멤버들. 이렇게 조화롭게 신, 구가 섞여있었던 적이 없어서 관객들에게는 관람 포인트가 될 수 있지 않을까요. 프레쉬한 <베르테르>와 오랜 내공을 가지고 작품을 지켜온 사람들의 <베르테르>가 이번 시즌에 새로운 숨결을 불어넣어 주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있어요.

말씀하신 것처럼 유연석, 카이, 나현우 배우가 새롭게 베르테르 역으로 합류했어요. 연습하면서 봐온 세 배우는 어떤가요?
저는 진짜로 너무 만족해요. 일단 유연석 배우는 한 사람의 동료로서 받는 감동이 있어요. 지금 굉장히 상승세잖아요. 아무래도 스케줄이 바쁘다 보니까 다른 사람들과 비교해 연습에 마음을 쏟기 쉽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다섯 명의 베르테르 중 가장 신인의 태도를 가지고 있어요. 대학 갓 졸업하고 뮤지컬 시장에 뛰어든 사람이라고 해도 믿을 만큼 열의가 넘치죠. 이런 모습이 베르테르와 어울리는 것은 물론이고 배우로서 존경심도 생기더라고요. 오랫동안 배우 생활을 하신 분이 자기가 익숙하지 않은 분야에 왔다는 이유만으로 기꺼이 몸을 낮추고 소통하려는 모습들을 보고 있으면 ‘이게 진짜 프로구나!’라는 생각이 드는 거죠. 반면 카이 배우는 저를 반성하게 했어요. 노래를 전공한 배우다 보니 연기 디테일은 조금 부족해도 괜찮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음악을 하는 후배에게 저 스스로도 선입견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게 해줬어요. 연습하면서 저를 매 순간 놀라게 하는 배우예요. 정말 기대하셔도 좋습니다. 모든 작품이 그의 대표작이 겠지만, <베르테르> 이후로 누군가 ‘카이의 대표작은 <베르테르>다.’라고 말하지 않을까 이런 생각이 들어요. 나현우 배우 같은 경우는 이런 큰 무대를 감당해보는 게 처음이잖아요. 그러다 보니 배우 스스로 힘들어하는 부분이 있긴 해요. 하지만 약간은 서툴지라도 더 잘하고 싶다는 열정을 가지고 있어요. 이런 점이 가장 베르테르 같죠. 또 베르테르와 가장 비슷한 나이대인 배우이다 보니 애쓰지 않아도 같은 시간을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자연스럽게 나오는 모습이 있어요. 개인적으로 나현우 배우가 <베르테르>를 하면서 성장해가는 과정을 봐주셨으면 해요. 주가가 확 오르듯 가파르게 성장할 거라는 믿음이 있거든요. 기대주로서 봐주시면 나중에 주주님들이 실망하지 않으시리라 생각합니다.(웃음)

다시 만난 규현, 엄기준 배우의 베르테르는 어떠셨나요?
규현 배우는 너무 깊어져서 왔어요. 그때는 소년 같은, 순수하면서 유약한 베르테르였는데 지금은 내면에 질풍노도가 생긴거죠. 이전에는 푸르디푸른 청년 베르테르였다면, 지금은 인생에 다른 계절들이 들어와서 입체가 생겼어요. 엄기준 배우는 제가 얼마 전에 SNS에 ‘엄기준은 베르테르 장인’이라고 썼더니 어떤 분이 댓글로 ‘이쯤 되면 명인’이시라고.(웃음) 엄기준 배우가 다섯 명 중에 나이가 제일 많은데 앙상블 배우 한 명이 연습하는 걸 보더니 놀라면서 “연기 시작하기 전에는 가장 선배님이라고 생각했는데, 연기를 시작하니 다섯 명의 베르테르 중에서 가장 어리게 느껴진다”라고 했거든요. 가장 오랜 시간 베르테르를 연구하고 베르테르의 본질을 아는 사람이다 보니 그 사람의 나이나 경력을 잊고 젊디젊은 베르테르로 보게 만드는 힘이 있어요.

롯데 역의 이지혜, 김예원 두 배우는요?
이지혜 배우는 이전 시즌에는 정말 아기였거든요. 마치 지금의 나현우 배우를 보듯이요. 그래서 1막에서 롯데의 해맑고 사랑스러운 모습을 정말 잘 표현했어요. 하지만 어리다 보니 2막의 복잡한 감정을 소화하는 데 어려움을 느꼈죠. 그래서 우스갯소리로 자기는 2막 2장에서 칭찬을 받아본 적이 없다고 했었는데, 이번에는 연출님이 “2막 2장에서 (이)지혜가 매 순간 살아있더라.”라고 극찬을 했어요. 그만큼 인생에서의 경험과 무대에서의 경험, 자기의 삶과 무대 위의 삶이 7년 동안 쌓여온 거죠. 마음속에 더 많은 섬세함이 생기고 사람과 인생을 이해하는 눈도 더 커졌고요. 그래서 요즘에 보기만 해도 흐뭇해요. 이렇게 멋진 주연 배우로 자라줘서, 노래와 연기가 다 되는 완성형 배우가 되어줘서. 지켜봐 왔던 스태프로서 감사하기도 하고 박수를 보내주고 싶어요. 김예원 배우는 노래를 정말 잘하는데 <베르테르> 같은 음악은 해본 적이 없거든요. 2막에서는 클래시컬한 창법이 나오지 않으면 소화하기 힘든 음역대란 말이죠. 그런데 가르칠 때 보면 스펀지 같아요. 잠깐 사이에도 어려운 노래들을 자기 것으로 만들어가고 있어요. 연기적으로는 매체에서 다양한 캐릭터를 많이 해봤기 때문에 서브 텍스트를 잘 읽고 감정 표현에 있어 섬세한 부분이 있어요. 그런 면에서 또 다른 롯데를 볼 수 있을 것이라 기대가 돼요. 저는 이번에 전체적으로 캐스팅 정말 잘했다고 생각해요.

이렇게 세심하게 배우들을 봐주시는 걸 보면 감독님은 정이 정말 많으신 것 같으세요.
굉장히 정이 많다고 주변에서도 말하는데 생각보다 그렇진 않아요. 조광화 연출님처럼 저를 오래 보신 분들은 “구소영이 정이 많아 보이지만 일할 때 보면 제일 냉정해.”라고 하시거든요. 그런 건있어요. 제가 제배우를 사랑하지 않으면 그 배우 안에 있는 장점, 때로는 이 배우가 가지고 있는 방어기제 등을 자세히 볼 수 없거든요. 결국 스태프는 배우를 통해서만 자기가 말하고자 하는 것들을 표현할 수 있어요. 제 음악에도 담기겠지만 그 음악을 관객에게 전달하는 건 배우잖아요. 배우들이 제 음악이다 라는 생각도 하는 거죠.

구소영 음악감독(좌)과 조광화 연출(우)

조광화 연출님과 오랜 시간 작품을 하고 계신데 잘 맞으시나요?
그동안 이런 질문을 정말 많이 받았거든요. 이 말을 너무 하고 싶었어요. 저희 정말 안 맞아요.(웃음) 저희는 너무 반대예요. 연출님은 비주얼적인 것부터 시작해서 배우들의 호흡까지 정말 치밀하게 만들어간다면, 저는 서로가 부딪히며 스스로 질문하고 찾아가는 과정을 기다리는 편이에요. 연출님은 연출 위주로 이루어지는 시대를 살아오셨기 때문에 초반부터 지향하는 게 무엇인지 확실하게 정해주시고 후반에 자유롭게 풀어주시죠. 스타일이 완전 다른 두 사람이 오랜 시간 같이 올 수 있는 이유 중 하나는 연출 님의 내면이 성숙하시기 때문인 것 같아요. 연출님은 제가 다르기 때문에 필요하다고 하시거든요. 저는 거꾸로 연출님을 보면서 자극을 받고 이런 부분이 나에게 필요할 수 있겠구나 하고 배워 나가죠. 만약 저희가 잘 맞는다고 보인다면 너무 안 맞아서 잘 맞아 보이는 것 같아요. 다만 작품을 만드는 데 있어 지향하는 지점은 같다고 생각해요. 그렇기 때문에 작품이 더 풍성해지는 것 아닐까요.

<베르테르>에서 협력 연출도 맡고 계신데 서로 다른 성향 때문에 연출님과 의견이 충돌하는 경우도 있을까요?
그런 부분은 없어요. 하지만 제가 봤을 때 너무 아니다 싶은 거나 여자 관객의 입장에서 봤을 때 불편하게 느낄 부분들을 이야기하면 “여자 입장에서 그렇게 느껴진다는 건 공감하니 내가 고민해볼게, 내가 생각지도 못했던 부분인데 좋은 아이디어야”라고 대부분 수용해주세요. 그러니 저도 연출님에 대해 기본적인 믿음을 가지고 보는 거죠. 또 제가 잘하는 부분에 있어 인정해주시기도 하니까요. 연출님이 큰 그림을 만드신다면 제가 배우들 내면의 동기나 이야기들을 만들어내곤 해요. 저희는 역할 분담이 잘 돼요.

2013년 뮤지컬 <아름다운 것들> 이후 연출가로서 작품을 만드신 지도 꽤 됐어요. 음악감독에서 연출가로 도전하게 되신 계기가 궁금합니다.
저는 음악감독을 하려고 시작한 건 아녔고, 제 작품을 하고 싶다는 꿈 하나로 시작했어요. 오히려 1차 적인 목표는 연출이었죠. 제가 좋아하는 이야기가 있는데 ‘모든 예술을 하는 이유는 결국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다.’ 저는 제가 세상에 하고 싶은 이야기를 담은 작품을 만들고 싶었고 그러려면 연출을 했어야 했죠. 그런데 전공이 음악이다 보니 음악감독으로 시작했고요. 오히려 이지나 연출님이나 조광화 연출님이 “너는 음악감독이지만 연출의 시각으로 작품을 보고 있는 사람이야. 더 늦기 전에 도전 해봐.”라고 용기를 주셨어요. 저는 지금도 연출이나 음악감독이 다른 일이라고 보지 않아요. 음악감독이 드라마를 보지 않고 음악만 잘해서 되는 건 아니거든요. 전체를 보느냐, 아니면 내 분야 안에서 집약적으로 보느냐의 차이인 것 같아요.

이번 20주년 <베르테르>를 통해 관객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으실까요.
진짜 감사하다는 말밖에는 할 수 없을 것 같아요. 저희가 더이상 무대를 올릴 수 없었던 어려운 시절에 본인들 돈을 투자해서까지 공연을 이어갈 수 있게 해주셨거든요. 오늘 오면서 그런 생각을 했어요. 원작에서는 베르테르가 일찍 죽었는데 한국 <베르테르> 관객들은 베르테르를 20년이나 키워서 중년으로 만들어주신 게 아닌가. 청년 베르테르가 이제는 중년이 되어 객석에서 흐뭇하게 무대를 바라보는 느낌. 그때 <베르테르>를 아껴주셨던 팬분들도 이제는 중년이 되셨어요. 20년 동안 남들이 별나다고 손가락질하면 “넌 별난 게 아니라 개성이 강한 것이다”라고 말해주고, 대중성이 없다고 말하면 “대중성이 없으면 어때 예술성이 있는데”라고 말해주면서 계속 가도 된다고 응원을 해주셨거든요. 그래서 <베르테르>를 지금까지 키워주신 분들께 너무 감사하다고 말하고 싶어요. 가능하다면 한 분씩 큰절 올리고 싶죠.

구소영 음악감독님에게 <베르테르>란 어떤 작품인가요.
제일 오래된 신발. 오래 걸으려면 얘를 신어야만 하는데, 익숙하다 보니 집에만 가면 벗어서 던져놓고.(웃음) 지나고 보니까 얘가 있어서 내가 걸을 수 있었구나 싶은 거죠. 이 나이가 되도록 제 대표작이 <베르테르>가 될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으니까 항상 고맙고 애틋한 존재인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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