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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어터플러스

피비린내 나지 않는 복수극_연극 <왕서개 이야기>

극복의 주체와 극복의 대상

지난 10월 28일에서 11월 8일까지 남산예술센터 드라마센터에서 선보였던 연극 <왕서개 이야기>
write 김일송


“사람과 그놈들 사이에는 일생에 한 번밖에 없는 약속이 있어요. 매들이 그래요, 한 번 약속이 깨지면 다시는 이 팔에 앉힐 수가 없어요. 그때가 벌써 21년이나 됐고….” 

주인공은 매잡이 왕겐조다. 중일전쟁 중 일본으로 도항한 그의 개명 전 이름은 왕서개로, 본래 그는 만주 동북평원에서 매를 놓아 아내와 딸의 단출한 가정을 유지하던 매잡이였다. 그러나 이 모두다 21년 전의 일이다. 연극 <왕서개 이야기>는 1953년의 일본을 배경으로 하지만, 모든 사건의 발단은 1932년 만주로 거슬러 올라간다. 

여기서 중국 역사를 다시 펼쳐볼 필요가 있다. 이야기의 시작이 되는 1932년은 만주사변이 일어난 해이다. 중국을 침공하려는 야욕에 쌓여있던 일본제국은 1931년부터 만주를 병참 기지화하기 시작했고, 1932년 2월에 이르러서는 만주 지역 전역을 점령하게 되었 다. 이후 일본은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 푸이를 수반으로 하는 괴뢰 정부 만주국을 세웠다. 이때부터 일본은 적극적으로 중국을 넘보기 시작했고, 1937년 중일전쟁이 벌어졌다. 연극 <왕서개 이야기> 는 이러한 역사와 무관하지 않다. 결론부터 말해 이 작품은 만주사변으로 인해 가족을 잃은 가장의 복수극이다.

전체적 얼개는 이렇다. <왕서개 이야기>는 주인공 왕서개가 과거 자신의 가족을 죽였던 일본군인 네 명을 차례로 한 명씩 찾아가는 구조로 되어있다. 전쟁이 끝난 후, 왕서개는 도일해 요코하마에서 이름을 버리고 일본인들에게 물건을 파는 장사꾼으로 생계를 유지 하고 있다. 그는 장사를 하며 자신의 가족을 죽인 가해자들을 찾아내고 복수를 준비한다.

그가 처음으로 찾아가는 인물은 대학교수 무타구치 노부오 (작전명 이치고)이다. 그는 물건을 배달하면서 노부오에게 신임을 얻은 후, 마침내 아내의 기일에 맞춰 복수를 감행한다. 노부호로부터 다음번 복수의 대상인 다케다(작전명 임팔로)에게 접근할 빌미를 마련한 그는 다케다를 찾아간다. 다케다는 중일전쟁 시 쌓은 전훈(戰 勳)으로 외무성 공무원으로 입신양명한 군국주의자로, 왕서개는 일본 천황의 생일에 맞춰 복수한다. 세 번째 인물은 나카노(작전명 바로바로싸)다. 그러나 나카노는 이미 상망하고, 부인인 하나코가 집을 지키고 있을 뿐이다. 하나코는 남편의 유골조차 받지 못한 전쟁미망인으로, 지금은 미군 건물에서 청소 일로 하나 있는 아들과 함께 생활하고 있다. 결국 세 번째 복수는 하지 못한 채, 왕서개는 마지막으로 반신불수가 되어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못하는 작전명 릴리를 찾아간다. 그의 유일한 간병인은 아내였지만, 아내는 넉 달전 집을 떠났고, 스스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릴리는 왕서개에게 총을 쏴달라고 요구한다. 그의 복수는 어떻게 마무리되었을까?

흥미로운 건 <왕서개 이야기>는 피비린내 나는 복수극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는 이치고에게 자백서를 쓰라 요구하고, 다케다에게는 자랑스러워하는 훈장을 빼앗는다. 그리고 나카노의 미망인 하나코에게 왕서개는 “나카노씨한테 안부 전해주십시오”라는 의미심장한 말을 남긴다. 그리고 릴리에게는 이미 아무 감각이 없는 다리에 총을 쏠 뿐이다. 과연 왕서개는 원하던 복수를 끝낸 것일까. 작가인 김도영에게 들어야 할 것이다. 그는 중국에 설치된 일본 전범 포로수용소를 배경으로 한 <무순 6년>(2018), 중국과 북한 접경 지역에서 인간 밀수를 하는 가족의 모습을 보인 <수정의 밤>(2019) 등 대륙의 역사를 극화한 바 있다.

이번 작품에서 그는 마치 ‘시치미 떼듯’ 왕서개의 내면을, 그리고 가해자들의 내면을 한 꺼풀씩 뜯어내 보이면서 전쟁과 인간, 가해자와 피해자, 진실과 비밀 등 다양한 겹의 이야기를 풀어냈다. 연극 <왕서개 이야기>는 지난해 남산 예술센터의 인큐베이팅 프로그램인 서치라이트를 낭독공연 형태로 선보인 작품으로, 올해 남산아트센터의 유일한, 그리고 마지막 초연작으로 무대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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