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oul
29 Oct, Thursday
7° C
TOP
Image Alt

시어터플러스

Better than Alone_첼리스트 박유신

Better than Alone

지난 해에 이어 두 번째로 막을 올리는 ‘어텀 실내악 페스티벌 2020’과 올해 처음으로 선보일

‘포항국제음악제’의 예술감독은 젊고 패기 넘치는 첼리스트 박유신이다.

그가 관객들에게 선보이고 싶은, 깊고 유연한 클래식의 세계.
editor 이민정 photographer 장호


이 또한 편견일 테지만 대개 클래식 아티스트들은 ‘콩쿠르 인생’에 마침표를 찍으면 국내외 ‘무대’ 위에서 역량을 발휘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첼리스트 박유신은 좋은 연주를 폭넓게 들려주는 것만큼 한국에 들어와 꼭 하고 싶은 일이 있었다. 유럽 소도시에서 열리는 작고 즐거운 축제를 국내에서도 열어보는 일. “5년 동안 유럽에서 생활하면서 부러웠던 것 가운데 하나가 작은 마을에 가도 음악 축제가 있다는 거였어요. 동네 어르신, 할머니까지 음악을 듣고 연주자들과 함께 공유하고 기뻐하는 모습이 인상 깊었거든요. 마침 목프로덕션(Moc Production)의 이샘 대표님과 이런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굉장히 적극적으로 응원해주셔서 힘을 낼 수 있었죠.” 그리하여 지난 가을 박유신이 예술감독으로 참여한 ‘제1 회 어텀 실내악 페스티벌’이 탄생했다. 올해로 두 번째를 맞는 이 축제는 단 이틀이지만, 국내뿐 아니라 세계 무대에서 활발히 활동하고 있는 젊은 연주자들의 패기 넘치는 연주를 들을 수 있다. 코로나19로 기획했던 그림이 바뀌고 계획을 뒤집는 일이 몇 번이나 있었지만, 그럼에도 그리 대중적이지 않은 곡들을 대가의 이름을 빌리지 않으면서 관객들에게 선보인다는 자체가 신선하고 놀랍다. 골치 아프고 어려운 일을 자처한 첼리스트 박유신에게 아름다운 가을 축제와 더불어 연주자로서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제1회 어텀 실내악 페스티벌’을 치른 지 일년이 지난 지금, 첫회의 리뷰를 해주신다면요.
첫회이기도 하고 실내악이라는 장르가 대중적인 인기를 지니지 않은 터라 걱정이 이만저만 아니었죠. 예술의전당에서 했던 날은 생각보다 많은 분들이 찾아와서 놀랐던 기억이 나요. 프로그램이 많이 알려진 것도 아니고 꽤 긴 곡인데도 지루하지 않고 즐겁게 들어 주셨고요. 굉장히 뿌듯했어요.

이번 페스티벌의 주제는 ‘1800년대’입니다. 낭만주의 음악의 정점에 있었던 이 시기를 데려온 특별한 이유가 있을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1800년대는 클래식의 역사상 가장 중요한 시기이고, 개인적으로도 독일 작곡가들을 좋아한 이유도 있어요. 광범위한 주제를 어떻게 구체화시킬지 고민하다 첫날인 10월 20일은 ‘라이프치히 음악신보’라는 부제로 베버의 피아노, 플루트, 첼로를 위한 삼중주, 브람스의 현악 육중주 1번, 브루흐의 피아노 삼중주, 슈만의 피아노 오중주를 꼽았어요. 이 네 작곡가의 공통점은 ‘19세기 독일’에만 있는게 아니에요. 낭만주의 음악의 선구자였던 베버는 슈만의 스승이 될 수도 있었으나 안타깝게도 슈만의 아버지가 그를 베버에게 보내려 했을 때 이미 베버는 세상을 떠나게 되었죠. 슈만은 음악 잡지 ‘음악신보’를 창간하게 되었고, 이 음악신보를 통해 브람스를 세상에 알리기도 하였고요. 브루흐는 슈만에게 피아노 협주곡을 헌정 받았으며 그의 음악에 많은 영향을 받았습니다. 페스티벌의 두 번째 무대인 10월 23일은 ‘Inspiration(영감)’ 이라는 부제를 달았어요. 체코와 폴란드 위주의 동유럽 작곡가들의 작품으로 구성되었는데 이 또한 ‘영감’이라는 키워드로 연결되어 있어요.

이 모든 프로그램을 전부 구성했나요.
타이틀, 프로그램, 연주자 섭외가 예술감독의 큰 업무니까요. 연주자들한테는 “이 정도 연주 괜찮을까요?” 여쭤보고 가능하다고 하면 바로 추진했어요.

‘어텀 실내악 페스티벌’이 다른 실내악 페스티벌과 다른 점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저희는 2회 공연이고 규모도 작아요. 보통 실내악 페스티벌에 가면 많은 연주자들이 1~2곡 정도 들려주는데 저희는 한정된 연주자가 많은 곡들을 들려줘요. 프로그램도 다소 길고 어려울 수 있지만 규모가 작기 때문에 모험과 시도를 다채롭게 할 수 있는 것같아요.

저는 이 페스티벌에서 젊은 에너지를 받아요. 예술감독과 연주가, 관계자들이 모두가 의기투합하는 모습?
작년에 연주의 에너지가 남달랐던 것도 비슷한 또래 연주자들의 합이 잘 맞아서 그랬다고 생각해요. 다리에 힘이 풀렸을 정도로 힘이 없다가도 리허설 때면 새로운 에너지가 제 안에 들어오곤 했죠. 물론 유명한 대가가 오셔서 남다른 음악과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도 너무 좋지만 비슷한 연주자들끼리 더 많은 것을 공유하고 교류하고 싶었던 마음이 있었어요.

언제 실내악에 관심이 생겼나요.
대학 때부터 좋아했어요. 규모가 되는 연주를 하든 피아노와 듀오를 하든 누군가와 합을 맞추는 걸 좋아했다고 할까요. 다른 연주자와의 교감을 통해 좋은 영향을 많이 받았기 때문에 제게 실내악은 굉장히 자연스러운 장르이기도 해요. 제가 학생이었던 때만 해도 실내악을 그리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분위기였는데 요즘은 학생들도 실내악의 중요성을 알고 그룹으로 시도하는 일이 굉장히 많아요. 독주가 전부가 아니라는 긍정적인 생각, 열린 생각이 마음이 들어요.

이 페스티벌을 위해 가장 얘기를 많이 나누는 연주자는 누구인가요.
‘노부스 콰르텟’의 김영욱과 김재영 바이올리니스트요. 늘 많은 영향과 영감을 줘요. 우리나라에서 ‘노부스’만큼 콰르텟이라는 장르를 그렇게까지 파고드는 이들이 있을까요? 같이 연주하면 실내악의 깊이가 다르다고 해야 할까요. 게다가 워낙 해외 페스티벌에 많이 다니는 분들이라 제가 원하는 축제의 모습과 방향을 고민하면 굉장히 많은 조언을 해주죠. 이 축제의 시작을 두고 할까 말까 고민했을 때도 응원해줬어요.제게는 없어서는 안 되는 든든한 연주자입니다.

내실 있는 축제가 되기 위해, 더 많은 이들에게 알려지기 위해 가장 필요한 부분은 무엇이라 생각하나요.
음… 어려워요. 스스로에 대한 얘기를 할 때 악기 자체도 남들보다 늦게 시작했고, 이 분야에 대해서 깊이있게 생각한 것도 남들 보다 늦으니까요. 이런 생각을 하면 제가 낮아져요. 어쨌거나 페스티벌에서 예술감독의 이미지는 클 수밖에 없잖아요. 저를 더많이 알리고 무대에서의 연주도 잘해내서 많은 이들에게 인정을 받아야 하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늘 합니다.

예술감독으로서 이 축제에 거는 기대는 무엇인가요.
많은 분들이 이 축제를 알게 되고 관심을 가져 주시면 너무 좋겠지만 관심을 유도하기 위해 따라가다 보면 제가 생각하는 페스티벌의 정체성을 잃을 것 같기도 해요. 그래서 천천히 가려 합니다. 몇 년 하다가 없어지는 페스티벌이 얼마나 많아요. 오랫동안 유지하는 것이 가장 힘든 일이라 생각하고, 이것이 저의 숙제입니다.

대개는 밥숟가락보다 악기를 먼저 잡았다고 하는데 늦게 시작했음에도 야나체크 국제 콩쿠르, 안톤 루빈슈타인 국제 콩쿠르, 드레스덴 국립음대 실내악 콩쿠르 등 세계 유수의 콩쿠르에서 입상할 수 있다니 놀랍고 희망적이기도 해요.
가족 중에 음악을 전공한 이는 한 명도 없고요, 그저 어릴 때부터 예체능을 다양하게 배우면 성장에 좋다더라 해서 부모님이 피아노도 시키고 바이올린도 시키셨죠. 그런데 어느 날 제가 바이올린 연주를 잘 못하니까 부모님이 낑낑거리는 소리 듣기 싫다고 첼로로 바꿔보라 하시더라고요. 앞집 언니가 첼로를 배우는데 연주를 잘 못해도 소리 자체가 묵직하니까 들을 만하겠다 생각하셨나 봐요. 저는 또 순종적인 아이라 바로 첼로로 바꿨죠. 포항에서 자란 저는 워낙 꿈이 소박했고, 악기를 배우면서도 음악가가 되어서 세계를 누벼야지, 이런 생각을 한 번도 한 적이 없어요. 그런데 첼로 선생님이 제게 가능성이 있다며 서울로 가서 깊이있게 배워야 한다는 거예요. 보수적인 경상도 부모님이 허락 하실 리 없죠. 서울도 못 가고 포항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했어요.

학창시절 바이올린과 첼로 중 어느 것이 더 좋았어요?
다 싫었어요.(웃음) 다만 제게 주어진 재능은 인내심과 끈기였어요. 뭔가를 시작하면 끝을 봐야하는 성격이라 좋아서가 아닌, 잘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죽어라 한 거예요. 진짜 음악이 좋아지기 시작한 건 스무살 때부터였어요.

특별한 계기가 있었나요.
클래식을 계속 듣다 보니 그저 좋아졌어요. 원하는 만큼 잘해내고 싶어져서 밥 먹는 시간만 빼고 악기만 가지고 살았어요. 그래서 스무 살 이후 첼로 외에 아무 경험을 못했어요. 시기가 늦은만큼 엄청 노력을 한 거죠.

그 노력 중의 하나가 드레스덴으로의 유학인 건가요.
대학교 2학년 때 송영훈 선생님의 스승인 아르토 노라스(Arto Noras)가 한국에 오셔서 마스터클래스를 한 적이 있어요. 송영훈 선생님의 추천으로 저도 배웠죠. 그런데 제가 송선생님의 제자인지 모르고 레슨해주신 뒤 그날 저녁 송선생님에게 마음에 드는 친구가 있다고 적극적으로 말씀해주셨다는 거예요. 송선생님은 또 그 사람이 저인지 몰랐다가 갑자기 생각났다고 밤에 전화를 주셨더라고요. 대학 다니면서 한국에서 할 수 있는 콩쿠르를다 나가고 졸업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독일 유학을 권하셨어요. 당황했지만 가고 싶었어요. 독일 드레스덴 국립음대에 첫 시험을 치르고 합격통지서를 받지도 못한 상태에서 에밀 로브너 교수님 한테 연락이 왔고요. 저를 필요로 하는 선생님께 가고 싶다는 생각에 바로 갔습니다.

에밀 로브너는 어떤 스승이었나요.
제 계획을 묻기에 저는 콩쿠르라고 대답했어요. 그때부터 저의 콩쿠르 인생이 시작됐죠. 그분은 제가 지쳐서 눈물이 날 때까지 레슨을 해줘요. 독일에서 가장 더운 여름, 40도를 웃도는 날 에어컨도 없는 교실은 펄펄 끓어요. 거기서 3시간 반 동안 저를 볶으면서 레슨을 하세요. 선생님과 저는 땀으로 온몸이 다 젖고 나중에는 저도 표정관리가 안되니까 짜증 섞인 투로 앉아있죠. 그런데도 그분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매일 그렇게 똑같이 연습 시켜요. 이 정도 연습시키면 할 얘기가 없어야 하는데 어쩌면 매일 다른 부분을 지적하는지 자존감이 떨어져서 어쩔 때는 막 울어요. 그러면 민망하니까 교실 나가셨다가 다시 들어와서 레슨해 줘요. 지금은 힘들게 배웠던 그 시간이 그립기도 하지만 그때는 정말 죽을 뻔했어요.(웃음)

콩쿠르가 간절했던 이유가 있었을까요.
저는 늦게 음악을 접하고 경희대학교에 들어갔는데 첫 학기 때부터 한예종이나 서울대에 다시 들어가라는 주위의 압박을 받았어요. 제가 예원학교를 나온 것도 아닌데 한국에서 인정하는 루트를 밟으려 노력하는 것이 이해가 안갔어요. 어떤 학교를 나오는 것보다 어떤 선생님한테 무엇을 배워서 어떤 것을 이뤄냈는지가더 중요하다고 생각했으니까요. 나름 반항심도 생겨서 제가 무언 가를 보여줘야한다고 생각했고, 그것이 콩쿠르였어요.

콩쿠르가 남긴 것은 무엇인가요.
실력이요. 상에 대한 가치도 높지만 콩쿠르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한 단계 성장해요. 성장을 위해서는 많은 길이 있지만 빠른 길인 것같아요. 아무래도 치열하고 계획적으로 연습하게 되니까요. 연주자, 예술감독과 더불어 졸업한 학교의 선생님이 되셨어요.

어떤 선생님인가요.
아직은 제게 열정이 남아있으니까, 아낌없이 다 퍼주고 싶어요. 연주 기회도 많이 주고 싶고요. 가끔 학생들에게 이거 해볼래? 하면 “저희가 어떻게…”라는 반응을 해요. 완벽해지기 위한 채찍질도 중요하지만 지금은 자신감을 주고 응원을 많이 하는 선생님이 되고 싶습니다.

박유신 앞에 많은 타이틀이 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연주자일 것입니다. 어떤 연주자가 되고 싶은가요.
앞으로 꾸준히 노력하는 연주자, 그래서 오래 기억되는 연주자가 되겠습니다.


*기사의 저작권은 ‘시어터플러스’가 소유하고 있으며 출처를 밝히지 않거나 무단 편집 및 재배포 하실 수 없습니다. 해당 기사 스크랩 시, 반드시 출처(theatreplus.co.kr)를 기재하시기 바랍니다. 이를 어기는 경우에는 민·형사상 법적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