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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은태의 법칙_뮤지컬 <벤허> 배우 박은태

박은태의 법칙

 

박은태의 세상을 이끌어가는 단순명료한 원칙들에 대하여.
editor김은아photographer Robin Kim stylist김선미

 


 

 요즘 종종 그런 생각이 들어요평생 소리만 생각하다가 죽을 것 같다는 생각.” 박은태가 말했다다른 누가 말했더라면 꽤나 멋부린 말로 들렸을 테지만숙고의 시간이 묻어나는 그의 목소리에는 말하는 그대로 믿을 수밖에 없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무슨 이유로 그렇게 숨어 있는 것이냐고 조금은 따져볼 생각이었던 마음이 어느새 사라져 있었다.

박은태는 화려한 필모그래피를 가진 배우다. <모차르트> <햄릿> <엘리자벳> <황태자 루돌프> <지킬 앤 하이드>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 <프랑켄슈타인>, 그리고 <지킬 앤 하이드>까지남자 배우라면 누구나 탐낼 만한 작품과 배역들이 그의 이력 안에 빼곡하다이는 어떤 후광효과 없이오로지 무대 위에서 자신의 실력을 증명함으로써 차곡차곡 쌓아나간 결과기에 더욱 의미 있다그러나 그는 자신의 이 특별함을 굳이 무대 밖에서 증명하려 하지 않는 배우이기도 하다무대 배우들의 진출이 잦은 드라마나 예능 프로그램은 말할 것도 없고작품의 공식 프로필 촬영을 제외하고는 흔한 인터뷰나 화보 촬영에도 응하는 경우가 드물다.

잠깐 다시 그의 필모그래피 이야기로 돌아가보자면오페라극장 지하에 숨어 사는 괴인(팬텀), 황후를 살해한 아나키스트(루케니), 인간이 창조한 피조물(괴물), 로맨틱한 사진작가(로버트)까지– 그가 맡아온 캐릭터는 좀처럼 한 카테고리로 묶을 수 없는 인물들이다유일한 공통점이 있다면 이 캐릭터들이 박은태와 만나면 어딘가 현세와는 유리된 초인(超人같은 신비로움을 띈다는 것이다이것은 어쩌면 무대 밖에서는 자취를 감추는 박은태 자신의 캐릭터와 묘하게 어울리는 것처럼 보인다어쨌든이 문제에 대한 박은태의 답은 명확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에너지가 부족해요다른 곳에 너무 많은 에너지를 쏟아버리면 무대에 지장이 생길 수 있으니까요새로운 사람들과의 협업이 즐겁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부담이 되기도 하거든요특히 제 본업인 뮤지컬을 벗어난 분야에서는요인터뷰방송 출연 같은 다른 노출은 삼가려고 하는 건 이런 이유에서예요.”


 

 

공연계에서도 박은태는 철저한 자기관리로 소문이 나 있다매일 병원에 들러 목 상태를 체크하고 보이스 레슨을 받는 것이 두 가지 일정만큼은 어떤 일이 있어도 빠지지 않는다고 그를 지켜본 이들은 말하곤 했다이 엄격한 루틴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뮤지컬배우라는 단어에 대한 정의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박은태는 뮤지컬배우라는 단어를 스포츠선수의 합성어와 같다고 말한다그는 차범근 감독의 이야기를 꺼내 들었다선수로 활동할 시절경기 후에는 반드시 두 시간이 넘는 근육 마사지를 받았다는 일화를. ‘세상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일이라고 회고할 정도로 큰 통증을 수반하는 과정임에도 무슨 일이 있더라도 빼놓지 않았다고 했다순전히 다음날 컨디션 관리를 위해서였다. “요즘에는 손흥민 선수가 출전하는 EPL 경기를 챙겨보는 편인데선수들이 부상을 당하지 않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더라고요뮤지컬배우도 같은 싸움을 하고 있다고 생각해요축구선수에게 다리 근육이 있다면 뮤지컬배우에게는 성대 근육이 있으니까요삐끗하는 순간 목의 결절이나 성대 부상이 생길 수 있기에 끊임없이 조심해야 하죠.” 



그의 말을 듣고 있자니연주회를 위해 비행기를 탈 때 악기를 위해 별도의 좌석을 구입한다는 첼리스트가 떠올랐다아마 클래식 연주자들을 유심히 지켜본 적 있는 사람이라면 알 것이다잠깐의 순간도 악기를 남에게 맡기지 않는다는 것을그야말로 악기를 자신의 몸처럼 소중히 여기는 것인데박은태에게는 그의 성대가 무엇과도 대체할 수 없는 악기인 셈이다가능한 한 오래또 건강하게 사용하기 위해서는 아끼고 아끼면서 보호할 수 밖에 없을 테니까그는 무엇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악기가 고장 났을 경우의 충격과 스트레스에 비하면세상 사람들의 즐거움– 친구 관계나 취미 생활에 대한 아쉬움은 아주 사소한 것처럼 느껴진다고 말한다대신 그 빈 자리는 오롯이 음악으로 채운다. “제 첫 번째 취미도 레슨 받는 거예요목 상태가 좋을 때 뮤지컬곡이 아닌 이태리 가곡이나 성악곡을 부르곤 하는데 노래가 잘 되면 그것보다 행복할 때가 없어요지금 저를 지도해주시는 선생님과는 8년을 함께했는데정년퇴임을 하신 연세가 지긋하신 분이죠저에게 많은 이야기를 해주시는데 결국 노래하는 노래쟁이는 노래로 먹고 사는 거야네 인생은 노래밖에 없어라는 얘기를 듣게 되면 저도 받아들이게 되죠나의 인생도 아마 평생 노래를 공부하고 소리를 고민하다가 끝나는 인생이 되겠구나하고요.”

 

 

 

 

그는 체념이 담긴 담담한 말투로 말을 이어간다그러나 그의 체념은 포기가 아니라 운명애(運命愛)에 가깝다. “한편으로는 되게 불쌍한 인생 같기도 해요모든 생활의 패턴과 바이오리듬이 목의 컨디션에 의해 결정되어버리니까컨디션이 좋으면 어떤 힘든 일이 있어도 스트레스를 안 받아요반면 아무리 행복한 일이 생겨도 목 컨디션이 안 좋으면 세상이 무너질 것 같고요그게 저의 직업병인 거겠죠.” 그렇다면 배우라는 이름을 떼놓은 인간 박은태의 기쁨은 무엇일까 문득 궁금해졌다공교롭게도 얼마 전 어린 학생들 앞에서 특강을 하던 중 같은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고 했다. “인간으로서 행복할 때가 언제인지를 곰곰이 생각해 봤어요물론 가족들과 시간을 보낼 때도 행복한데가장 행복을 느낀 건 안 되던 노래가 될 때였던 것 같아요스스로의 노래가 늘 때트레이닝을 하면서 잘 안됐던 것들을 극복할 때몇 년을 해도 안되던 창법이 될 때재미있는 건그러다 다음날은 또 안 돼요그게 성악을 전공하신 분들이 20-30년을 하고도 계속 공부를 하는 이유더라고요저는 뮤지컬배우니까 여기에 연기까지 더해져야겠죠그래서 이번 생은 이렇게계속 평생을 공부하면서 사는 그런 생이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죠.”

박은태의 필모그래피에는 신중하고 천천한 발걸음이 그대로 드러난다자신이 밟은 땅을 단단히 다져가면서 결코 서두르지 않고 나아간다그는 재공연을 베이스로 탄탄히 기반을 쌓으면서 1~2년에 한 작품 정도 단비 같은 신작 출연 소식을 전해준다이전 공연에서보다 더 발전된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는 점에서 재공연에 부담감을 느끼는 배우들도 있지만 박은태의 관점은 다르다. “재공연이 조금 더 편안해요뮤지컬은 매번 똑같은 감정과 표현을 보여줘야 한다는 점에서 장인정신을 필요로 하는 장르라고 생각하는데덕분에 하면 할수록 배역에 더 깊이 들어간다는 걸 체감해요. ‘진실의 벽에 더 가까워지는 느낌이랄까요초연의 누구도 한 번도 해보지 않은 날 것에서 나오는 설렘배우·관객 모두 무엇이 나올지 모르는 긴장감도 매력적이지만요.”

 

 

그를 진실의 벽’ 앞에 가장 가깝게 데려다 놓은 작품은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2013·2015)>와 <프랑켄슈타인(2014·2015·2018)>이다지저스를 연기할 때는 십자가에 매달린 존재들의 아픔에 다리가 후들거려 극장을 나설 수 없었고괴물은 그가 이성적으로 감당할 수 없는 아픔과 슬픔을 선사했다특히 괴물과의 만남에는 첫 아이의 탄생이라는 개인적인 상황이 맞물리며 감정의 파장이 겉잡을 수없이 커졌다. “갓난아기를 보면서 괴물은 태어난 지 겨우 세 살이라는 생각이 들어 서럽더라고요그 정도로 현실과 구별이 잘 안 되게 작품에 깊이 빠졌어요그때 성대도 많이 상했죠노래할 때는 감정에서 한 걸음 떨어져서 성대가 상하지 않게 해야 하는데분노를 참을 수가 없으니까그런데 한 작품으로 배우를 그만둘 것이 아니잖아요다음 날도 공연을 해야 하는데얼른 컨디션을 회복하지 못하면 배우로서 자기관리를 못한 것이 되니까요지금은 연기는 연기에서 머무르되관객에게는 진짜를 전하는 연기에 대한 공부를 하면서 노하우를 찾아가고 있어요.”



여러 시즌에 걸쳐 하나의 인물을 연기하는 동안누구보다 캐릭터를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창작 과정에 목소리를 낼 때도 있다. <프랑켄슈타인>의 괴물의 솔로곡 상처가 대표적이다괴물이 한 아이를 호수 속으로 밀어버리는 장면에서 독백처럼 부르는 곡이다이는 자신을 창조한 빅터에게 복수하기 위해 그의 누나를 죽이는 장면과 연결된다. “재연 때 이 곡이 등장하는 순서가 바뀌었어요순서 하나 바뀌는 거야 뭐하고 생각하실 수도 있겠지만 캐릭터의 감정선은 전혀 달라져요아이를 죽임으로써 다시 복수를 생각하게 되는 것과누나를 죽인 다음 허탈감에 아이를 밀어버리는 것은 괴물의 입장에서 너무 다르게 다가오더라고요연출님께 부탁을 드려서 지난해 공연에서는 초연 때와 같은 순서로 돌아오게 됐죠비로소 이거다’ 싶더라고요배우로서는 연출님의 의도를 따라가야 하는 것이 맞아요그렇지만 저는 괴물이라는 캐릭터를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아쉬운 점이었기에 의견이 반영되었을 때 정말 행복했어요.”

 

 

 

2014-2015년과 2018-2019년 두 차례에 걸쳐 출연한 <지킬 앤 하이드>는 또 다른 의미에서 특별한 작품이다그가 이 작품에 참여하겠다고 발표했을 때 지인들은 물론 그의 팬들조차 기대보다는 우려의 목소리를 냈다그의 목소리는 특유의 고운 미성이 장점인데하이드 역은 묵직한 저음과 함께 목을 긁는 소리를 내야 했기 때문이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선택을 밀어붙인 이유는 단순했다. “한 번 밖에 못 사는 인생이니까”. “남자 배우가 도전할 수 있는 최고의 배역이죠한 마디로 설명하면 <프랑켄슈타인>의 빅터와 괴물이 합쳐진 것과 마찬가기잖아요작품의 퀄리티도 높은 데다원톱 주인공이 이만큼 눈에 확 들어오게 만드는 작품은 <지킬 앤 하이드외에는 거의 없을 걸요남자 배우라면 누구나 탐이 날 수밖에 없는 배역이에요그래서 너무 하고 싶었어요죽이 되든 밥이 되든.” 결과적으로 그는 다른 배우들과는 전혀 다른 결의 지킬과 하이드를 탄생시켰다한국 프로덕션의 열 번째 지킬로 참여한 첫 시즌은 물론이고, 5년만에 다시 돌아온 2018년 공연에서도 연일 매진을 이어가는 기록을 세웠다이 작품은 그에게도 자신의 잠재력을 발견하게 했다. “하이드를 통해 저음의 깊이 있는 소리를 개발하는 계기가 되었어요덕분에 남자주인공에게 무게감을 실어주는 중저음 베이스의 소리도 조금이나마 낼 수 있게 되었죠남자 배우는 점차 아버지 역할로 가게 되는데이 때 중요한 것이 목소리의 무게감이거든요나이가 들어가는 과도기에서 <지킬 앤 하이드>가 큰 도움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박은태는 2년 만에 <벤허무대에 선다그는 작품의 표면적인 줄거리귀족 집안의 아들이 친구에게 배신을 당해 고초를 겪다가 기적을 만났다는 이야기를 넘어서인물에 입체감을 불어넣기 위해 오랜시간을 고민했다그리고 그 해답을 작품 속의 예언이라는 키워드에서 찾았다극중에서 유대인들은 메시아가 로마군을 몰아내고 유대를 구원할 것이라는 예언을 믿고 기다린다벤허 역시 온갖 고난을 겪으면서도 예언을 유일한 희망이라고 생각하며 버텨낸다그렇기에 “나의 벤허는 예언을 부정하는 사람으로 만들고 싶다는 박은태의 말은 예상 밖이다인본주의(人本主義)적인 벤허의 성정을 생각해보면 당연하게 느껴진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벤허는 민족을 사랑하기에 유대인이 핍박에서 벗어나기를 간절히 원하지만마냥 예언이 반갑지는 않았을 겁니다만약 예언이 이루어진다면 유대인들을 총칼로 죽이는 비인간적인 일을 하게 될 테니까요말에게도 채찍질을 하지 않는 사람이니아마 좀 더 평화로운 해결책을 기대하지 않았을까요결국 메셀라의 계략에 의해 그의 소망은 좌절되지만이렇게 예언을 중심으로 벤허의 마음이 갈등하는 것을 표현하면 어떨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다만 예언의 실현이나 메시아의 출현에 초점이 맞춰지면 자칫 종교적인 메시지가 강해질 수 있기에겉으로 드러나는 연기가 아닌 캐릭터의 마음 속에 내재된 생각으로 자연스럽게 묻어 나오도록 표현하겠다는 것이 그의 계획이다이어 신앙을 가진 관객이라면 더 깊은 의미를 찾을 수 있을 것이고종교가 없는 관객이라도 이야기 자체에서 재미를 느낄 수 있을 것이라고 덧붙인다.

 

 

<벤허>에서 예언이라는단어만큼 반복되는 것이 운명과 숙명이다박은태가 생각하는 자신의 운명은 무엇일까. “요즘 자주하는 말이 있어요. ‘내가 무슨 팔자길래 지금 지킬을 하고 있지라는 거예요제가 2006년 처음 뮤지컬을 하겠다고 <라이온 킹앙상블 오디션에서 부른 노래가 지금 이 순간이거든요. EBS에서 방송했던 ()승우 형의 공연 클립을 보고 준비했죠지금 무대에서 그 곡을 부르고 있다니 아직도 실감이 안 나요그래서인지 많은 분들에게 박수를 받고 인정을 받는 이런 상황이 눈 깜짝할 사이에 없어질 수 있다는 생각을 해요더 노력하려는 것도 같은 이유고요언제 사라질지 모르니 할 때 더 잘하자는 마음이죠.” 어떤 질문에도 바닥에 두 발을 단단히 붙이고 있는듯한 침착함이 흥미로워 괜히 비슷한 질문을 다시 한 번 던져본다. “박은태의 숙명은 무엇인가요?” “글쎄요숙명이라… 너무 멀리 생각하지는 않아요제 인생의 가장 큰 관심사는 그저 성대고 컨디션이에요야구선수는 어깨만 생각하잖아요류현진 선수가 어깨를 다치면 누가 그 공을 던질 수 있겠어요저 역시 마찬가지죠컨디션이 좋으면 더없이 행복하고나쁘면 세상 우울하죠그게 저의 제가 은퇴하기 전까지 가져야 할 숙명인 거죠이 컨디션을 가지고 내 인생이감정이나 행복도가 좌지우지되는 건 제가 받아들여야 할 숙제겠죠.”




무대 밖이 아니라 무대 위에서도 아직 꺼내놓지 않은 박은태의 새로운 모습이 있을까. “아직 많죠.” 그는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계속 멋있는’ 역할만 해왔잖아요유쾌한 코미디를 해보고 싶어요무엇보다 비극적이지 않은행복한 모습으로 공연할 수 있는 작품을 해보고 싶어요그런데 저를 불러주는 작품들은 결국 제가 꼭 죽거나 울더라고요?(웃음)” 그러나 그의 바람이 실현되기까지는 조금 시간이 걸릴 것으로 보인다얼마 전 <스위니 토드>의 캐스팅 발표를 통해 소식을 전했듯이번 겨울도 살인을 일삼는 이발사의 모습으로 나게 되었으니머지 않은 시일에 그의 바람처럼따뜻하고 환한 무대에서 그의 밝은 모습을 만나기를 바라본다. “종종 그런 꿈을 꿔봐요제가 정말 행복한 마음으로 무대에 서는 공연을요그러려면 일단 노래를 부르지 않는 역할이어야겠죠하하제가 무대에서 즐겁게 할 수 있는 역할저로 인해 많은 분들이 웃을 수 있는 따뜻한 공연을 꼭 해보고 싶어요.” 
 
 

 

“‘결국 노래쟁이는 노래로 먹고 사는 거야, 
네 인생은 노래밖에 없어’ 라는 얘기를 들을 때 직감하죠. 
내 인생도 평생 노래를 공부하고 소리를 고민하다가 
끝나는 인생이 되겠구나, 하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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