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젠더의 옷을 벗으니, 예술이 넓어졌다_젠더프리 공연

젠더의 옷을 벗으니, 예술이 넓어졌다

젠더프리 캐스팅은 나날이 더 많은 작품에서 더 다양한 방식으로 시도되고 있다. 이처럼 진화하는 젠더프리의 양상을 살펴보았다.

editor 김은아


젠더 프리(Gender-free) 캐스팅. 이는 배우나 작품 속에서 정해진 캐릭터의 성별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캐스팅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전까지는 외국 무대에서는 종종 시도되어온 방식이지만, 한국에서 처음으로 조명이 되었던 것은 2015년 공연된 뮤지컬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를 통해서였다. 연출가 이지나는 작품 속 헤롯왕을 전통적으로 남자 배우가 맡아왔던 헤롯왕 역을 배우 김영주에게 맡겼다. 당시로는 파격적인 도전이었기 때문에 한동안 작품의 주인공인 지저스나 유다보다 더 큰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이지나 연출은 이후 <광화문연가(2018)>의 월하 역에 정성화와 차지연을 함께 캐스팅하면서 다시 한 번 이러한 시도를 거듭했다. 그는 작품의 제작발표회 자리에서 “월하는 관념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굳이 성을 구분할 필요가 없는 존재다. 역사 속 실존 인물처럼 성별이 명확해야 하는 역할이 아니라면 남성·여성을 나눠서 캐스팅하지 않으려고 한다”고 설명했다.

첫 젠더프리극이 주목 받은 후 불과 4년이 지났지만, 그사이 젠더프리 캐스팅 위상(?)에는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개막하는 공연 중 상당수가 젠더프리 캐스팅을 시도하고 있으며, 관객들 또한 열렬한 지지를 보내고 있기 때문. 이러한 변화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원인으로는 2018년의 공연계 ‘#미투’ 사태가 꼽힌다. 유명 연출가와 배우 등의 성범죄 사실이 드러나면서 공연계는 물론 사회 전반을 발칵 뒤집어놓았다. 관객들은 피해자들을 향해 지지와 연대를 보내는 ‘#위드유’ 운동을 펼치는 것과 동시에 보다 근본적인 해결책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이에 화두로 떠오른 것이 무대 위의 성평등과 페미니즘이었다. 특히 여성 배우가 남성 배우에 비해 설 수 있는 무대가 턱없이 부족하다는 점에 대해서 공연 창작자들에게 적극적인 개선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이에 하나의 해결책으로 젠더프리 캐스팅이 등장하기 시작한 것.

현재 공연을 통해 볼 수 있는 젠더프리 캐스팅의 유형은 크게 세 종류로 구분할 수 있다. 먼저 원작에서 설정된 남성 캐릭터를 여성이 연기하는 것이다. 지난 6월 공연된 연극 <묵적지수>가 대표적이다. 이는 초혜왕과 묵자가 모의전을 치를 고사를 모티프로 작품으로, 연출가 이래은은 실제 역사 속에서는 남성이었던 두 인물에 모두 여성배우를 캐스팅했다. 정동극장의 가무극 <적벽> 역시 제갈량과 조자룡, 주유를 여성 배우가 소화했다. 이 경우에는 작품에서의 성별은 남성으로 남겨두거나 캐릭터에서 성별의 여부를 구분할 수 없도록 모호한 영역으로 남겨두기 때문에 같은 배역을 남녀 배우가 함께 맡기도 한다. 2인극 뮤지컬에서 모든 배역에 남녀 배우를 혼성 캐스팅한 <해적>이 대표적인 예다.

신(神)이나 동물, 관념 등 성별 구분이 필요 없는 판타지적인 캐릭터 또한 젠더프리 캐스팅을 시도하기에 좋은 경우다. 앞서 언급한 <광화문연가>의 월하는 3500년 살아온 ‘연애의 신’으로, 2018년공연에서 이 캐릭터를 맡은 구원영·김호영·이석훈은 성별의 차이를 넘어 자신만의 개성으로 매력적인 캐릭터를 완성해냈다.

마지막으로는 배우의 성별뿐 아니라 캐릭터의 성별 자체를 반전함으로써 작품에 새로운 재미를 더하는 시도가 있다. 셰익스피어의 고전 <햄릿>과 <로미오와 줄리엣>을 재탄생시킨 <함익>과 <줄리엣과 줄리엣>의 경우다. <함익>은 덴마크의 왕자 햄릿을 한국사회를 살고 있는 30대 여성으로 변주해 복수와 사랑, 그리고 자신의 정체성 사이에서 갈등하는 캐릭터를 보다 현대적이고 복합적으로 그려냈다. <줄리엣과 줄리엣>은 작품의 주인공을 남녀가 아닌 여성 커플로 설정함으로써, 금지된 사랑에 대한 애틋함과 절절함을 배가시켰다.

젠더프리 캐스팅 공연은 점차 확대되는 추세다. 지난 5월에는 <로빈슨 크루소>가 아동극으로는 최초로 젠더프리 캐스팅을 하는 의미있는 시도를 했다. 모험심과 의협심이 넘치는 로빈슨 캐릭터를 남녀가 번갈아 맡음으로써 어린이들이 성 고정관념에 사로잡히지 않는 것을 의도한 것이다. 창작자들 역시 젠더프리 캐스팅을 시도하는 공연이 늘어나는 현상에 긍정적인 시선을 보내고 있다. <줄리엣과 줄리엣>의 극작가이자 배우 한송희는 젠더프리 캐스팅을 “여성·남성으로 한정 짓지 않아도 한 인물의 근원은 바뀌지 않을 것이라는 시선이라는 점에서 매우 창의적이고 혁신적”이라고 평가한다. 그는 “이처럼 성역할에 관한 우리의 편견을 여러 방면으로 확인하게 만드는 작품은 젠더프리가 아닌 공연에서도 캐릭터를 바라보는 시각을 확장시킨다고 생각한다. 이를 통해 성 고정관념을 넘어서 더 입체적이고 살아있는 캐릭터들을 만들어나갈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한다”고 말했다. 젠더프리 공연이 더욱 폭넓은 갈래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확장되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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